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비 제국 (문단 편집) == 군사 == 사파비 제국군의 핵심은 1등 개국공신이자 사파비 제국의 무력 그자체나 다름없는 튀르크계 [[키질바시]]들이었다. 하지만 제국을 세울 때는 더할 나위없이 유용하던 이들이 정작 제국을 개창하고 나니 골칫거리로 변한다. 기존의 페르시아 권력층들이 밖에서 굴러들어온 키질바시들을 원만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키질바시들도 지방에서 제 세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황실을 우습게 보고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황제와 중앙정부에 계속 대들면서 황제의 속을 썩였다. 특히 키질바시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서 [[이스마일 2세]]는 아예 이들에게 살해당했을 정도였고, 이스마일 1세 사후 임명된 5명의 총사령관들 중 3명이 단지 페르시아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키질바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페르시아 출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우 튀르크인인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키질바시들로 인한 불만이 날로 커지자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던 아바스 1세가 대규모 군사 개혁을 단행한다. 아바스 1세는 예전 황제들처럼 대놓고 키질바시들의 권한을 줄이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제3의 세력을 키웠다. 그는 주로 [[캅카스]] 지방에서 끌고온 노예들을 개종시켜 황제 직속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 직속군은 크게 4개의 병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가 12,000여 명 정도의 '샤셰반[* '왕의 친구들'이라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먼 옛날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끈 [[친위대]]인 [[헤타이로이]] 역시 '왕의 친구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이라고 하는 키질바시 출신 군대였다. 전임 황제들에게도 쭉 충성을 유지해온 키질바시들로 이들은 제 부족을 버리고 황제 본인에게만 충성할 것을 맹세한 이들이었다. 즉 황실보다 제 가문과 부족이 훨씬 더 중요했던 일반적인 키질바시들과는 달랐다는 말. 두 번째가 '굴람'이다. [[예니체리]]의 페르시아 버전으로 개종한 기독교도[* 여기서 기독교는 유럽의 기독교가 아닌 중동의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노예들로 이루어졌고, 아바스 1세는 이를 4만 명 수준까지 늘리면서 사실상 사파비 제국의 주력군으로 만들어 버릴 시도를 했다.[* 기독교도 노예병이라는 표현에서 뭔가 익숙하다 느낄텐데 그 느낌이 맞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맘루크이기 때문. 정확히는 맘루크의 페르시아어 호칭이 굴람인것으로 흔히들 맘루크하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떠올리겠지만 맘루크는 일종의 병과를 나타내는 용어로 정치체가 아니다.] 세 번째가 [[찰디란 전투]]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교훈삼아 만든 12,000명 상당의 총병들이었고 마지막 네 번째가 12,000여 명 수준의 [[포병]]들이었다. 다만 이 포병의 경우 지나치게 서양 기술에 의존해 4개의 병종들 가운데 최약체로 꼽혔다.[* 그래도 훗날 이 포병대는 [[나디르 샤]]의 군사개혁으로 더 강해지면서 페르시아군의 주력을 담당하게 된다. 허나 이는 사파비 제국 시대가 아니니 서술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기껏 군사개혁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파비 제국군의 최대 주력군은 역시나 [[키질바시]]였다. 왜냐면 수적으로는 굴람이 훨씬 우세했을지 몰라도 키질바시가 사파비 군사력의 절반 넘게를 차지하며 여전히 확고히 사파비 제국의 주력군으로 자리를 유지했고 키질바시들도 모를리가 없어 이를 눈치채고 기를 쓰며 방해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들은 주로 튀르크계 부족 출신의 기병 전사들로, 시간이 흐르며 페르시아계나 쿠르드계 부족들도 스며들었다. 다만 가장 세력이 컸던 부족들은 우스타줄루 부족, 샴루 부족, 룸루 부족, 아프샤르 부족[* 후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카자르 부족[* 후일 [[카자르 왕조]]를 개창한다.] 등 모조리 튀르크계였다. 초창기에는 이스마일 1세를 신처럼 모시고 숭배했지만 점차 거리가 멀어졌고 결정적으로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가 대패하면서 황제와의 거리가 확연히 멀어졌다. 참고로 이들은 황제에게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제 소유의 봉토에서 알아서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 세금으로 생활했는데, 그 대가는 황제가 부를 때 즉시 군사를 끌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봉건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지나치게 많은 땅을 소유하며 지역의 군벌이 되자 위협을 느낀 역대 황제들이 땅을 사들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키질바시들이 눈치채고 방해하면서 실패했다. 황제의 개인 호위병은 '쿠르치'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이 키질바시들에게서 모집한 인원들이었지만 부족이 아니라 황제 본인에게 충성하며, 키질바시와는 달리 황실로부터 봉급을 지급받는다는 점에서 황제의 친위대인터라 키질바시와 구분된다. 쿠르치들의 총사령관은 '쿠르치 바시'라고 불렀다. 이스마일 1세 시기에는 쿠르치가 3천 명, [[타흐마스프 1세]] 시기에는 5천 명이었다가 [[아바스 1세]] 시절에 키질바시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15,000여 명까지 크게 늘어난다. 황제 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쿠르치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그 수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 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굴람이 4만 명 정도가 있었고, '툽치'라고 불리는 12,000여 명의 [[포병]]과 '토팡치'라고 불렀던 12,000여 명의 총병이 있었다. 능력과 봉급의 수준과 비례했던 사파비 제국에서 최약체나 다름없던 포병들의 대우는 열악했고, 포병들의 사령관인 톱치 바시의 대우도 나머지 병종 사령관들에 비해 열악했다.[* 톱치 바시의 1년 연봉은 2천 토만이었는데 이는 무려 1만 토만에 달했던 총병 사령관 '토팡치 바시'의 연봉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다. 그러다보니 페르시아에서는 포병이 기피되는 직종이었다.] 다만 그 질과 상관없이 아바스 1세 시절 사파비 군대가 이전의 허술한 기병 집단에서 본격적인 화기 보병 중심의 대군으로 변모했다는 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사파비 제국을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과 묶어 [[화약제국]]이라 부른다. 다만 이 화약 제국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논란이 많다. 일단 사파비 제국의 총포 사용량은 유럽, 오스만, 무굴에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로 낮았고 질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안정적으로 운용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무굴 제국도 100여 년의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급속도로 붕괴하면서 제대로 된 화약 군대를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질좋고 체계적인 화기를 갖춘 대군을 운용한 '제대로 된 화약 제국'은 오스만 제국 하나밖에 없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